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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이야기

정책입안자를 위한 탄소시장 인사이트

by idea-4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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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탄소시장은 더 이상 환경부처만의 영역이 아닙니다.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기후정책의 도구를 넘어, 세수, 산업 구조, 무역 규범, 국제 협약 등 거시경제와 맞닿은 정책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정책입안자는 탄소시장을 규제 수단이 아닌 경제 질서 재설계의 도구로 인식하고, 구조적 설계 역량을 갖춰야 할 시점입니다. 이 글에서는 규제형 탄소시장(ETS)과 자발적 시장(VCM)의 구조, 글로벌 시장의 흐름, 그리고 실질적인 정책 설계 체크포인트를 중심으로 탄소시장에 대한 입체적인 인사이트를 제시합니다.

 

 

정책입안자를 위한 탄소시장 인사이트
탄소 발생

 

 

탄소시장의 구조와 메커니즘: 규제형 ETS vs 자발적 VCM

탄소시장은 탄소에 가격을 부여함으로써 온실가스 감축을 유도하는 대표적인 시장 기반 메커니즘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시장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정부가 법적으로 총량을 정하고 기업 간 거래를 허용하는 규제형 배출권거래제(ETS, Emissions Trading System)이며, 다른 하나는 자율적으로 감축 실적을 만들어 크레딧을 발행·거래하는 자발적 탄소시장(VCM, Voluntary Carbon Market)입니다. 두 시장은 구조와 목적, 참여 방식이 상이하며, 정책 목적에 따라 선택적이거나 병행 활용될 수 있습니다.

ETS는 국가 또는 지역 단위에서 법적 감축 목표를 설정하고, 일정한 총량(cap)을 기반으로 산업계에 배출 허용량을 배분한 뒤, 기업 간 초과·잉여 배출권을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도록 설계된 제도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유럽연합의 EU ETS, 대한민국의 K-ETS, 중국의 국가 ETS 등이 있으며, 대부분의 선진국은 이 제도를 기후정책의 핵심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ETS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캡앤트레이드(Cap and Trade)’ 원리에 따라 작동합니다.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해 점차 허용 총량을 줄이고, 기업은 정해진 범위 안에서 배출하거나, 감축 투자 후 잉여분을 판매하여 수익화할 수 있습니다. ETS는 감축 유인을 가격 메커니즘으로 유도하며, 시장 수요에 따라 배출권 단가가 실시간으로 변동됩니다. 이 구조는 시장이 자발적으로 최적의 감축 비용을 찾아가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반면, VCM은 법적 규제 대상이 아닌 기업이나 단체, 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감축 실적을 인증받고, 이를 크레딧 형태로 거래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감축의 추가성(additionality)과 검증 가능한 실적의 인증입니다. 인증기관(Verra, Gold Standard, ACR 등)이 프로젝트의 환경적 효과를 평가하고, MRV(측정·보고·검증) 체계를 통해 신뢰성을 확보한 뒤, 탄소 크레딧을 발행합니다. 이 크레딧은 VCM 플랫폼 또는 기업 간 직접 거래를 통해 시장에 유통됩니다.

VCM은 글로벌 기업의 ESG 전략, 공급망 관리, 투자자 요구에 따른 비규제형 대응 수단으로 활용되며, 특히 Scope 3 대응과 상쇄(Offset) 전략에서 활발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업은 자사 배출을 줄이기 어려운 경우, 고품질 크레딧을 구매해 상쇄함으로써 탄소중립 목표 달성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지속가능보고서, CDP, TCFD 공시 등에도 반영되며, 국제 인증 기준과도 연계되고 있습니다.

정책 설계자 입장에서 ETS와 VCM의 가장 큰 차이는 ‘강제성’과 ‘시장 유연성’에 있습니다. ETS는 배출 대상과 감축 의무가 명확하고, 국가 감축 목표 달성에 직접 기여하는 제도입니다. 반면 VCM은 유연하고 확장성이 높지만, 제도 신뢰 확보를 위한 인증, 품질 기준, 투명성 확보 등의 과제가 존재합니다.

실제로 일부 국가들은 두 제도를 연계하거나 보완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는 자발적 크레딧의 일부를 규제시장 상쇄 수단으로 인정하며, EU는 Article 6 기반 국제 감축 실적을 자국 ETS와의 연계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이는 향후 글로벌 탄소시장 통합 가능성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결론적으로 ETS는 국가 주도의 감축 목표 이행과 시장 기반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제도이며, VCM은 민간 중심의 자율적 기후행동을 확산시키는 유연한 구조입니다. 정책입안자는 두 시장의 구조적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국가 상황과 산업 특성을 고려해 제도 설계의 방향성과 접점을 도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글로벌 탄소시장 동향과 주요 국가 비교

탄소시장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각국은 자국의 산업 구조, 정치 체제, 국제 협약 이행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ETS 및 VCM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를 비교 분석하면, 제도 설계에 있어 고려해야 할 정책 요소들이 보다 명확히 드러납니다. 특히 EU, 중국, 북미 등은 정책적 완성도와 시장 신뢰성 측면에서 각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의 EU ETS는 가장 오래되고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탄소시장입니다. 2005년부터 시행된 EU ETS는 다단계 계획기간(Phase) 운영, 배출권 유상경매 확대, 항공·해운 부문 확대 등 끊임없는 제도 개선을 통해 탄소가격 신호의 강력한 전달과 산업계 감축 유도에 성공한 사례입니다. 특히 2026년부터 단계 도입 예정인 CBAM(탄소국경조정제도)는 탄소시장이 무역 정책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환점으로, 국내외 정책 설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중국은 2021년부터 전국 단위의 국가 ETS를 출범시켰으며, 현재는 발전 부문을 중심으로 운영 중입니다. 이 시장은 세계 최대 배출국인 중국의 산업 구조를 반영하여 데이터 중심의 점진적 확대 전략을 취하고 있으며, 향후 제철, 시멘트, 화학 등 고배출 업종으로 단계적 확장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중국 ETS의 특징은 강한 중앙집권적 운영과 동시에 시장 활성화보다 감축 목표 이행의 수단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미는 규제 단위가 연방이 아닌 주 정부 중심의 ETS 분산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캘리포니아 주의 Cap-and-Trade 제도와 동북부 RGGI(Regional Greenhouse Gas Initiative)가 있으며, 두 제도 모두 VCM과의 연결 가능성, 고품질 상쇄 인정 구조, 시장 투명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정책 설계의 유연성을 보여줍니다. 특히 캘리포니아는 규제시장에서 자발적 크레딧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을 통해 ETS와 VCM의 실질적 연계를 일부 실현하고 있습니다.

ASEAN 및 아프리카 국가들도 점차 탄소시장 설계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자체 탄소세와 VCM 기반 시장을 연계한 하이브리드 모델을 구축 중이며, 인도네시아, 베트남은 시범 ETS를 통해 제도 운영 경험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대규모 REDD+ 프로젝트 중심의 VCM 참여가 활발하며, 탄소시장 접근을 통해 기후 정의(Climate Justice)와 지속가능개발 목표(SDGs)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파리협정 Article 6의 이행 메커니즘이 탄소시장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Article 6.2는 국가 간 감축 실적 이전(ITMO)을 가능하게 하며, 6.4는 글로벌 감축 프로젝트 인증 및 유통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입니다. 이는 기존의 VCM과 규제 ETS 간 제도적 정합성과 통합 논의를 촉진시키고 있으며, 향후 글로벌 시장 연계를 가속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의 K-ETS는 제도 설계 측면에서 EU ETS의 틀을 따르되, 산업 보호를 위한 무상할당 확대, 주기별 계획기간 운영, 정부 중심의 시장 안정화 조치 등 한국적 산업 특성과 수용성을 반영한 유연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래 유동성 부족, 가격 변동성, 기업 간 정보 격차 등의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으며, 향후 Article 6 기반 연계 전략, VCM과의 연결 가능성, 고품질 외부감축 인정 범위 등에 대한 정책적 판단이 요구됩니다.

정리하자면, 글로벌 탄소시장은 동일한 목표(온실가스 감축)를 향하지만, 국가별 제도 설계는 매우 상이하며 각국의 접근 방식에서 실질적인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책입안자는 글로벌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국내 제도의 전략적 보완과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둔 설계 역량을 가져야 합니다.

 

 

 

 

정책입안자를 위한 탄소시장 설계 체크포인트

탄소시장은 단순히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정책 수단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산업구조의 전환과 경제 시스템의 재편을 유도하는 거시적 프레임입니다. 따라서 제도 설계 초기 단계부터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균형 잡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정책입안자는 다음과 같은 핵심 체크포인트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시장 신뢰성 확보를 위한 인프라 설계입니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배출량 산정, 감축 실적 검증, 크레딧 발행 등 모든 과정에 대해 투명하고 일관된 MRV(측정·보고·검증) 체계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MRV는 단지 기술적 요건이 아니라, 시장 참여자의 신뢰와 국제 연계의 전제 조건입니다. 특히 IT 기반 플랫폼, 위성·AI 활용 MRV, 블록체인 기반 거래기록 등 디지털화된 관리 구조는 향후 글로벌 탄소시장의 기술적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번째는 배출권 가격의 안정성과 시장 유동성 확보입니다. 지나치게 낮은 가격은 감축 유인을 약화시키고, 과도한 가격 상승은 기업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려 시장에 혼란을 초래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가격 하한선 및 상한선 설정, 시장안정화 메커니즘(정부 보유 배출권의 전략적 공급·회수), 금융기관의 유동성 공급 유도 등 정교한 가격 조절 장치가 필요합니다. 거래소 운영 규칙, 파생상품 도입 여부 등도 이러한 안정화 전략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산업계 수용성과 감축 목표 간의 균형 설계입니다. 제도는 강력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이면 산업계 반발과 비용 전가, 고용 문제 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탄소 업종이나 중소기업에 대해 단계적 감축 유예, 무상할당 비율 조정, 기술지원 연계 등 전환기적 완충 장치를 포함한 유연한 설계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산업계가 실제 감축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인센티브 기반 구조도 함께 마련되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국제 탄소시장과의 정합성 및 연계 가능성 확보입니다. 파리협정 Article 6 기반의 국제 탄소시장 메커니즘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제도가 글로벌 기준과 얼마나 정렬되어 있는가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고품질 외부 감축실적(ITMO)을 국내 ETS에서 상쇄 수단으로 인정할지 여부, 자발적 시장 크레딧을 수용할 기준, CBAM 대응 가능성 등은 정책 설계 단계부터 고려되어야 할 중장기 전략 요소입니다.

다섯 번째는 투명한 데이터 공개와 시민사회·시장 참여 유도입니다. 배출량 데이터, 가격 동향, 감축 실적 등의 정보가 일반에 개방되고, 다양한 시장 참여자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정보 공개 체계는 시장 활성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민간 MRV 인증기관, 크레딧 중개사, 기술 스타트업 등 다양한 민간 생태계가 제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개방형 구조도 정책 설계의 핵심입니다.

마지막으로, 제도의 점진적 확장성과 재설계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탄소시장은 고정된 시스템이 아니라, 감축 기술 발전, 국제정세 변화, 산업계 구조 개편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해야 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유연한 설계 원칙을 도입하고, 일정 주기로 제도 평가 및 개편이 가능하도록 법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국 탄소시장 설계는 단순히 환경부처의 일이 아니라, 산업, 외교, 재정, 기술을 모두 아우르는 정책 조정의 산물입니다. 정책입안자는 이 시장의 설계자이자 운영자라는 시각으로,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미래 지향적인 틀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결  론  -  탄소시장은 기후정책의 ‘도구’가 아니라 ‘프레임’입니다

탄소시장은 단순한 감축 수단을 넘어, 국가의 산업구조, 무역 질서, 기술혁신 방향까지 규정하는 새로운 정책 프레임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규제형 ETS와 자발적 VCM의 구조적 차이를 이해하고, 글로벌 시장의 흐름을 읽으며, 국내 제도의 유연성과 정합성을 동시에 설계하는 일이 정책입안자의 핵심 역할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기 감축 수단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인 전환을 견인할 수 있는 정교하고 개방적인 시장 설계입니다. 지금은 탄소시장을 기후 대응이 아닌 경제 전략의 핵심 축으로 바라봐야 할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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