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 “기업이 탄소를 돈 주고 산다고? 그게 진짜로 가능해?”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언뜻 들으면 낯설지만, 실제로 한국에서도 수년째 시행 중인 국가 기후정책의 핵심 수단입니다. 이것은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 총량을 정해 기업에 나누어주고, 남거나 부족한 배출권을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도록 만든 제도입니다. 말 그대로 “탄소를 돈 주고 사는 구조”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국은 2015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국가 단위의 배출권 거래제를 도입했으며, 지금은 수백 개 기업이 이 제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도의 존재는 많이 알려져 있는 반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고, 어떤 기업이 어떤 절차를 거쳐 탄소를 사고파는지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영역입니다.
본 글에서는 한국의 탄소배출권 거래제(ETS)가 도입된 배경부터 제도의 설계 원리, 거래 주체와 절차, 그리고 제도 운영의 현주소까지 체계적으로 풀어보며, 우리나라의 기후경제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한국형 ETS, 왜 도입됐고 어떻게 설계되었나?
한국의 탄소배출권 거래제(ETS)는 온실가스 감축을 효과적으로 유도하면서도 기업의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시장 기반 정책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세계적인 감축 흐름 속에서 국내 산업 경쟁력과 기후 책임을 동시에 고려한 제도 설계가 특징입니다.
한국형 탄소배출권 거래제(ETS: Emissions Trading System)는 2015년부터 본격 시행된 제도로, 정부가 정한 온실가스 배출 허용 총량 내에서 기업이 탄소를 ‘사고팔 수 있도록’ 만든 시장 기반의 환경 규제 수단입니다. 이 제도의 도입 배경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국제기후협약에 대한 대응이며, 다른 하나는 국내 기업의 온실가스 감축을 효율적으로 유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1997년 교토의정서, 2015년 파리협정을 계기로 전 세계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제도화하기 시작했고, 한국도 이에 발맞추어 감축 정책을 구체화할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특히, 산업·에너지 부문에서 배출량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순 규제 방식보다는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한 유연한 감축 수단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2012년 ‘온실가스 배출권의 할당 및 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 2015년 1월 1일부터 제1차 계획기간이 시작되며 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한국 ETS는 유럽연합(EU ETS)의 설계를 일부 참고했으나, 국내 산업 구조와 에너지 소비 특성을 반영해 독자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기본 구조는 정부가 매년 온실가스 총 배출 허용량을 설정한 뒤, 이를 배출권 형태로 기업에 할당하고, 기업은 연간 배출 실적에 따라 이를 거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배출권은 크게 무상 할당과 유상 할당으로 나뉩니다. 초기에는 산업계의 부담을 고려해 대부분 무상으로 배정되었으나, 최근에는 탄소가격 신호를 강화하기 위해 유상 할당 비율을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력, 철강, 시멘트 등 탄소 다배출 업종은 일정 기준에 따라 일부 유상 할당 대상이 되고 있으며, 향후 국제 환경 기준에 맞춰 유상 비율을 더 높일 계획입니다.
ETS는 35년 단위의 계획기간(플랜 기간)으로 운영되며, 현재는 제3차 계획기간이 진행 중입니다. 각 계획기간마다 총 배출 허용량, 할당 방식, 감축 목표, 배출권 이월·차입 규칙 등 주요 제도 설계가 조정됩니다. 또한 제도의 신뢰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배출량 측정(Monitoring), 보고(Reporting), 검증(Verification) 체계인 MRV 시스템도 함께 구축되어 있습니다.
ETS는 단순한 감축 수단이 아니라, 국가 감축 목표(NDC: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달성을 위한 핵심 제도로 기능합니다. 실제로 한국은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40%의 온실가스를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수립했고, ETS는 이 목표 달성의 중심축 중 하나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한국형 ETS는 국제 규범에 부합하면서도 국내 산업의 현실을 고려한 맞춤형 제도이며, 점진적 제도 정비와 시장 안정화 조치를 통해 점차 성숙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향후 유상할당 확대, 제도 신뢰도 향상, 기업의 대응 역량 강화 등이 중요한 발전 과제가 될 것입니다.
배출권은 누가 받고, 어떻게 거래되고 있을까?
한국의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만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정부가 대상 기업에 배출권을 할당하고, 기업은 이를 실제 배출량과 비교해 부족하거나 남는 배출권을 시장에서 거래합니다. 그 과정에는 엄격한 측정과 보고, 검증 체계가 함께 작동합니다.
한국형 탄소배출권 거래제도는 모든 기업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규모 이상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기업만을 대상으로 운영됩니다. 정부는 매 계획기간마다 ‘관리업체’를 지정하는데, 이는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이 일정 기준(예: 125,000톤 CO₂e 이상)을 초과하는 사업장 또는 기업입니다. 이들은 배출량 보고 의무와 함께 배출권 거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됩니다.
지정된 관리업체에게는 매년 일정량의 배출권이 할당됩니다. 할당 방식은 업종별, 시설별 기준에 따라 산정되며, 과거 실적과 감축 목표를 반영해 조정됩니다. 할당된 배출권은 해당 기업의 회계연도 동안 사용할 수 있으며, 실제 배출량과 비교해 초과하거나 부족한 경우 이를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습니다.
이 배출권 거래는 주로 한국거래소(KRX) 탄소배출권 시장에서 이루어지며, 현물거래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한국거래소는 2015년부터 국내 유일의 배출권 거래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관리업체는 이 플랫폼을 통해 직접 배출권을 매수하거나 매도할 수 있습니다. 거래는 평일에만 가능하며, 거래 단위, 가격, 수량은 모두 실시간으로 공개됩니다.
또한 기업 간 장외(OTC) 계약 방식의 거래도 허용되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조건(가격, 거래 시점 등)을 맞춘 쌍방 간 계약으로, 대규모 수량을 안정적으로 거래하거나,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할 때 활용됩니다. 일부 기업은 배출권 전문 중개사를 통해 맞춤형 거래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시장에서 거래되는 배출권은 금융자산의 성격도 갖고 있어, 기업 회계상 자산 항목으로 등재되며, 필요 시 전략적으로 보유하거나 유동성 확보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일부 기업은 배출권을 매도해 수익을 올리거나, 감축 기술 도입 이전의 대응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거래의 전제 조건은 배출량에 대한 신뢰 가능한 데이터 확보입니다. 이를 위해 ETS는 MRV 시스템(측정·보고·검증)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관리업체는 배출량을 자발적으로 측정하고, 이를 정부 시스템에 보고해야 하며, 외부 검증기관의 심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 데이터는 환경부와 한국환경공단이 관리하며, 부정확한 보고나 고의 누락이 적발될 경우 과태료 부과 또는 할당 조정 등 불이익이 따릅니다.
연말이 되면, 각 관리업체는 자신의 실제 배출량을 정부에 최종 보고하고, 그에 상응하는 배출권을 제출(정산)해야 합니다. 제출하지 못한 경우에는 초과분에 대해 과징금이 부과되며, 그 금액은 배출권 평균 가격의 일정 배율로 계산됩니다.
요약하자면, 한국의 ETS는 대규모 온실가스 배출 기업을 대상으로, 정부의 할당을 기반으로 한 실물 시장이며, 실제 거래와 규제, 회계, 정책이 동시에 작동하는 복합 시스템입니다. 배출권 하나가 단지 종이 한 장이 아니라, 기업 경영 전략의 중요한 축이자 국가 감축 목표를 실현하는 열쇠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시장 활성화와 기업 부담 사이, 제도의 현주소는?
탄소배출권 거래제도는 한국의 탄소중립 전략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다양한 과제와 개선 요구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배출권 가격의 변동성, 거래 활성화 부족, 기업의 비용 부담 등은 제도의 안정성과 신뢰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2015년 시행된 한국의 탄소배출권 거래제도는 현재 제3차 계획기간(2021~2025년)을 지나며 성숙기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제도가 안정화되며 참여 기업 수도 증가하고 있지만, 시장 유동성 부족과 기업 부담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선, 시장 활성화 측면에서 보면 거래량과 가격의 불안정성이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입니다. 한국거래소 배출권 시장의 거래량은 EU ETS 등 해외 시장에 비해 낮은 편이며, 비활성화된 기간이 잦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는 기업들이 불확실한 감축 전략이나 규제 대응 부담으로 인해 배출권을 전략적으로 보유하거나, 거래를 꺼리는 경향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배출권 가격 또한 변동성이 크고, 정책에 따른 급등락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정부의 유상할당 확대 발표나 국제 감축 목표 변경 등 외부 요인에 따라 가격이 급등하거나 반대로 수요가 급감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가격의 불안정성은 기업의 감축 투자 계획과 예산 수립에 영향을 주는 불확실성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ETS가 감축 동기 부여보다는 비용 부담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에너지 다소비 업종이나 생산설비를 해외로 이전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의 경우, 감축 여력이 부족한 데다 할당량도 점점 줄어들어 배출권 구매 비용이 고정비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실제로 일부 기업은 감축 투자를 단행할 자본이 부족하여, 배출권 구매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제도의 효율성과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개선책 마련에 나서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상할당 비율 조정, 배출권 시장 안정화 조치(시장안정화제도, 안정화 물량 공급), 중소기업에 대한 감축 컨설팅 및 재정지원 확대 등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또한 기업의 자발적인 감축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크레딧 거래 시장(BAU 감축 인센티브 시장)과의 연계 가능성도 검토 중입니다.
한편, 한국 ETS는 국제 탄소시장과의 연계성 확보라는 중장기 과제도 안고 있습니다. EU는 자국 내 탄소세(CBAM)를 도입하면서 수입제품에 간접적인 배출권 부담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에 대응하려면 국내 ETS가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구조와 투명성을 갖추는 것이 필수입니다. 이를 위해 국제 MRV 표준 정렬, 외부 크레딧 활용 확대, 외국 ETS와의 연계협정 체결 등도 장기적인 전략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한국의 배출권 거래제는 일정한 제도적 기반을 갖추었지만, 시장의 안정성과 기업의 수용성 간 균형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제도가 단순한 규제를 넘어서, 국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기후경제 수단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탄력적인 제도 설계와 지속적인 피드백이 반드시 동반돼야 할 것입니다.
결론 -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규제’이자 ‘기회’입니다
한국의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온실가스 감축을 제도화하고, 기업의 기후 대응을 유도하기 위한 핵심 정책 수단입니다. 제도의 기본 틀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정부와 기업 모두 점진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거래 비활성화, 유상할당 부담, 중소기업 대응 한계 등 현장 중심의 개선 과제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탄소배출권 제도는 단순한 규제를 넘어, 기업이 친환경 기술과 에너지 효율화에 투자할 수 있는 동기와 자금을 창출하는 메커니즘입니다. 또한 배출권이라는 자산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며, 기후경제로의 전환을 선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정책의 안정성과 시장의 투명성을 함께 강화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기업에게는 부담이 아닌 전략적 기회로 작용하고, 국가적으로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실질적 추진력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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